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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여성들

오솔주 2024. 2. 5. 15:28


우리의 역사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전히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성차별의 흔적들이 때론 아름다운 전통으로 미화되기도 하고, 오늘날의 젊은 여성들은 그저 이기적이고 드센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가끔씩 나는 가부장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을 꿈꾼다. 여성이라서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 여성이라서 행복할 수 있는 공간. 하지만 이를 찾기란 쉽지 않은 듯 하다. 차라리 나의 바람의 수준을 낮추는 것이 훨씬 더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가 될 듯싶다. 굳이 유교 문화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남성을 그 중심에 둔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여느 사회의 역사를 뒤적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특히 고대로 갈수록 여성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는 종교의 영역에서도 여실히 보여진다. 마리아는 성스러운 어머니일 수는 있었으나 결코 신이 될 수 없었고, 그 성스러움 역시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출산으로 비롯된 것이었음을… 일정한 나이가 되면 으레 결혼을 해야만 되는 존재로, 아이를 낳아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어야만 하는 존재로만 여겨지는, 여성을 향한 이러한 시각은 그리스의 여신들을 바라보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은 한 명의 여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결코 쉽지 만은 않은 행위이다. 하지만 부정하고픈 순간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변화는 시작되리라는 믿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역사의 순간순간에서 여성들의 행동을 조명한다. 프랑스 혁명, 그 거대한 움직임을 선동하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자유와 평등의 미명하에 권력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오히려 혁명은 그녀들에게 전통적인 가정의 영역으로 복귀할 것을 요청했다. 단두대에서 처형되던 수많은 목숨들을 즐기는 여성들을 향한 시선은 날카로웠다. 남성에게는 결코 덧붙여지지 않는 수식어가 그녀들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고, 그녀들 안에 잠재되어 있는 공격성은 생리 중이라거나 임신 중이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끊임없이 부정되었다. 그녀들을 설명한 것은 남성들의 언어였다. 타자의 시선에서 그녀들은 끊임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되었다. 남성, 즉 아버지와 아들의 대를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남성이 존재할 때 비로소 존재로 여겨지는, 여성은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녀들에게는 개인성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들을 향한 성폭력은 집단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주목 받았다. 그녀들을 향한 남성들의 폭력은 이에 대한 집단적인 반발이 존재치 않으면 그대로 수용되었고 묵인되었다. (오히려 폭력의 가해자가 당당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이는 이해가 될 것이다. 피해자인 여성은 오히려 침묵하고, 가해자는 어디선가 또 다른 폭행의 대상을 찾아 배회하는 현실을…)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것은 다름 아닌 전시에 행해지는 여성들을 향한 체계적인 강간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잘 알려져 있듯 여성은 아이들과 더불어 전쟁 발생시 제 1의 피해자이다. 대다수의 전쟁에서 여성들은 승리자들의 (집단 강간에 의하여) 전리품으로 전락했다. 그녀들은 폭력의 흔적을 치유할 기회를 갖기 힘들었고, 오히려 적의 아이를 잉태한, 민족의 순수성을 더럽힌 존재로 손가락질 받았다. 많은 이들은 이러한 집단 강간의 실태를 비난했지만, 자신들 역시 또 다른 강간을 통해 강간에 대한 보복을 행할 뿐이었다. 이 과정에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없었다. 그녀들은 폭력의 한 가운데 놓여있지만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영역에 머무르는 존재로, 남성들의 보호를 받는 존재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리스 사회에서 여성들이 시민의 범주에 들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도 군대에 보내야 진정한 남녀 평등이 이루어진다는 주장 속에서 이러한 의미는 내포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사람들은 무감각해지고 있다. 이라크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자행되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침묵할 뿐이다. 하지만 그 폭력의 피해자 대다수는 어린 아이와 여성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아픔을 남성의 언어가 아닌 아이의 언어로, 여성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우리 사회는 시도치 않는다. 그렇게 여성들은 입이 없는 존재로, 타자의 시각에 의해 철저히 미화된 존재로, 그렇게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여자들이 감내하는 폭력의 보다 일상적인 주제와 오랜 시간 터부로 여겨지던 여자들의 폭력이란 주제를 교차시키면서, 여자들의 폭력이란 주제에 접근하는 것이 여성사를 새롭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세실 도팽과 아를레트 파르주 주변으로 모인 여성 역사학자들과 인류학자들 · 철학자들은 이러한 확신을 공유하고 있다. 그들의 보다 강도 높은 긴장감 속에서 파악된 양성간의 관계는 그만큼 더 분명하다. 납치 · 강간의 난폭성이건, 신화 속 아마존 여인들의 난폭성이건, 혹은 혁명기 서민 여자들 의 난폭성이건, 역사적 분석의 대상이 된 난폭성은 남성의 영향하에 있던 사회의 여성에게 있던 뚜렷한 기이함을 드러낸다. 그것은 전쟁의 논리를 거부하고, 그렇기 떄문에 국가의 논리를 거부하는 난폭성인 동시에 여성의 소외를 드러내기 위해 남자들의 폭력보다 더한 폭력을 제시하는 난폭성이다.

양성간 전쟁 에 대한 접근보다 더 멀리로 나아가기 위해 지배자/피지배자라는 매우 고정된 모델을 벗어나야 한다. 사회의 여러 형태에 불안정성 자체를 되돌려 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 폭력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몇 가지 전투적인 담화의 결렬 의지 앞에서, 혼합성을 언제나 다른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줄 아는 태도 역시 필요하다.


서문 - 세실 도팽과 아를레트 파로주

제1부 도시 국가 : 여성의 폭력으로 무엇을 하는가?

고대 그리스에서 폭력의 구축에 대하여 : 살인하는 여자들과 유혹하는 남자들 - 폴린 슈미트 팡텔

도시 여인들, 선동가들과 단두대에 열광하는 이들 - 도미니크 고디노

제2부 구속하는 사회, 일어날 수 있는 이동

여자들에게 어울리는 미덕들(1610~1660) - 다니엘 아스-뒤보스크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사 개념들과 명백한 불평등. 파리, 18세기 - 아를레트 파로주

19세기 사회의 약한 여성들과 강한 여성들 - 세실 도팽

여성 경범죄의 구축 - 낸시 L. 그림

지옥과 천국? 현대 그리스에서의 폭력과 가벼운 횡포 - 마리 엘리자베트 핸드만

제3부 20세기의 잔인성, 강간과 전쟁

무장 해제된 여자들을 상대로 한 남자들의 무기 : 에스파냐 내전에서 폭력의 성적 차원에 대하여 - 야니크 리파

공중 폭격 : 전사 죽이기? (1914~1945) - 다니엘 볼드만

전쟁과 성의 차이 : 체계적인 강간 (구유고슬라비아, 1991~1995) - 베로니크 나움-그라프

추신

스트린드베리의 여성 혐오적 시선으로 본 노라의 모습 - 주느비에브 프레스